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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의 시간

 

Holy Motors, 허구에서 실재로

조준용의 사진전 《Holy Motors》(2024)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레오 카락스(Leo Carax)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 홀리 모터스(2012)를 느슨하게 오마주한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한 작업은 아니다. 애초부터 그의 사진은 도로 위를 달리면서 자동차 바깥으로 투사하는 특정적 방식을 지속해 왔다. 그 시작은 경부고속도로였다.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받아 최초의 산업화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작가의 아버지의 베트남 참전 서사가 덧붙여진다. 그렇게 조준용은 참전 당시 아버지의 사진을 한밤의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허공에 투사한다. 지나가는 화물열차 트레일러가 스크린이 되어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매우 사적인 기록물이 허공에서 꿈틀거리다 사라진다. 이는 아버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작가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향한 일종의 제의에 가까운 작업으로 산업화, 국가, 국제정치, 베트남, 열대의 풍경이 듬성듬성 얽힌 냉전 시대의 몽타주가 나타났다 사라진다(Memory of South, 416km, 2014). 그럼 이쯤에서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 영화는 영화가 걸어온 길을 모더니티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전유한다. 사진은 기계미학의 첨병이자 모더니티를 상징한다. 이 광학술의 기계는 고전주의적 재현의 의미를 한순간에 소멸시킨다.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사진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락스는 이처럼 사진의 탄생부터 연속사진의 등장과 최초의 영화의 탄생을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처럼 보여준다. 판도라를 연 인물은 카락스 자신이다. 영화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지닌 한 인물(드니 라방, Denis Lavant)의 일상을 따라간다. 끊임없이 갈라지는 이야기들이 관통하는 주제는 세상을 보는 시선에 있다. 특히 카메라가 포착하는 대상의 기이함을 통해 정체성을 질문하고, 나아가 비물질적인 가상공간 시스템은 디지털 시대의 존재와 실재에 관한 철학적인 물음이 내재한다. 여기에서 홀리 모터스는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리무진의 이름이자 신의 죽음 이후 기계문명이 이룩한 최고의 상징물을 비유하는 듯하다. 절정에 도달한 영화의 중간에는 파리의 시테 섬(Île de la Cité)으로 향한다. 카메라는 모더니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라사마리텐 백화점(La Samariaine) 안으로 빨려들 듯 진입한다. 갑자기 호주의 팝스타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와 드니 라방(Denis Lavant)이 만나 할리우드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미장센이 펼쳐진다. 실재와 가상이 혼합된 이 장면은 당시 폐업한 라사마리텐을 통해 폐허가 된(지연된) 모더니티의 현재를 암시한다. 카락스는 강철로 만들어진 에펠탑처럼 용도보다도 높이와 속도를 향해 질주하던 시대의 몰락과 비물질화된 이후의 시대를 교묘하게 몽타주 한다.

 

비장소

앞서 그의 초기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준용의 사진은 개인적 물음에서 시작되어 냉전시대를 거쳐 과거를 현재로 소환함으로써 그의 작업이 필연적으로 모더니티의 유산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작업은 산업화를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와 아버지의 월남참전 기억을 상호교차함으로써 개인과 국가, 국가와 산업화의 길목에서 20세기 한국이 지나온 경로를 탐구하는 계기를 통해 조준용은 도로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첫 전시 이후에도 도로는 고속도로의 방음벽, 고층 아파트 벽면 등을 스크린으로 이용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비장소의 시설물이 스크린으로 전유되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사진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가 생계를 위한 활동이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이동하는 시간에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교통 정체 구간에 있을 때나 가능했기에, 그는 아예 정체 구간에서 사진을 찍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렇게 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는 한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로 반대편 손을 이용해 주로 자신의 측면을 피사체로 삼는다. 어떤 대상이 사진의 피사체가 될 것인지를 완벽하게 결정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한계이면서 또한 하나의 미학적 실험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측면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도심의 고속화 도로 위에서 자동차의 속도를 감안하여 피사체를 직접 보지 않고 한 손으로는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은 카메라를 쥔 상태로 셔터를 누른다. 이쯤 되면 자동차의 속도와 카메라의 속도가 동기화되었다고 불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건, 왜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사진을 찍는가이다. 사실 실험은 목적지가 없기에 그저 온몸을 이용해 더듬어가며 시도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정답이 없기에 먼저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기계와 신체 사이의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이 뒤따른다. 그렇게 포착된 사진들은 납작하고 비인칭적이며 불투명한 무언가였다. 그는 분명히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면만을 응시해야 하는 도로에서의 측면은 비장소 그 자체였다. 고층 아파트와 방음벽으로 매워진 지나가는 장소는 그 무엇에게도 정동을 느끼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조준용의 사진은 삶의 이야기가 담긴 인류학적 장소가 아닌 비인칭의 대상, 그래서 ‘서사의 공백’ 상태인 비장소에 정초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고속도라는 비장소에는 주로 방음벽과 같은 구조물, 토목시설 등이 즐비한데, 이러한 사물들은 신자유주의 자본가치를 위해 존재한다. 소음을 줄이는 방음벽은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장치 그리고 더 빠른 물류 운송을 위해 삶의 형태는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바깥’의 존재를 지우는 장치가 된다. 조준용이 시도하는 측면의 사진은 전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비틀어 도로와 삶의 경계를 틈입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인칭

조준용의 사진은 기계문명과 연관이 깊다. 특히 그에게 도로는 사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여주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로에 대한 관심과 이를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것이 속도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비판하기 위함은 아니다. 미술사적 관점으로 볼 때 속도란 미래주의의 유산과 동기화되는 경우가 대부분 일 텐데, 조준용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속도는 미래주의적이라기보다 산업화라는 이념이 임계점을 넘어 더 이상 조절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모더니티에서 벗어나지도, 그렇다고 정주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주차장이 되어버린 고속화도로, 교통문화의 변화로 인해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자동차 면허시험 연습장, 사방이 고층아파트로 막힌 도로의 주변과 속도에 의해 멈춰 서버린 수리를 기다리는 자동차의 모습은 이미 현재로 들어온 미래라는 디스토피아와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디스토피아가 낯설거나 특이해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조준용의 사진이 세계의 종말을 재현하거나 그런 미래를 포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유형학적 사진과는 달리 사건의 현장 내부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방식은 전지적 시점이 아닌, 도로라는 구조물 주변의 비인간 존재를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을 사유하게 한다. 어찌 보면 주어진 한계 상황을 통해 세계를 관측하려는 시도가 다소 제한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 여정을 통해 작가는 드디어 도로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겹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결국 텅 빔(blankness)이라는 외상에 도달한다. 정체 구간의 가다 서기, 여기저기 부서진 동어반복적인 도로의 구조물, 스키드 마크의 틈새를 따라가다 보니 나타난 자동차 운전연습장은 자본-기술-문화-사회의 속도 사이의 어긋남이 어떻게 본다는 현실을 파열(rupture) 시키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할 포스터(Hal Foster)는 이미지의 반복과 재생산은 결국 혼란과 되돌이킬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조준용의 사진은 구체적인 목적이나 비평적 지점을 설정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비장소와 비인칭의 대상을 기록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기호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더럽거나 거칠고 부서져 있지만 스펙터클을 가지지 않기에 사람들이 외면해온 장면들이다. 그의 사진이 가진 아름다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Holy motors>_작업노트

 

조준용

 

2019년 한대의 35mm 자동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시작한 사진의 여정은 6번째 연작으로 확장되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간의 퍼즐과 같은 사진은 이제 서로를 붙잡으며 마치 하나의 조각처럼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 같다. 이제 막 시작한 7번째 연작은 또 어떤 감각으로 그동안의 시간들을 이어서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다.    

나에게 운전을 하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는 잠시 동안 복잡한 도시의 구조에서 이탈하여 시간과 공간의 주체가 되어 그것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시동을 켜고 본능적으로 조수석에 놓인 소형 자동카메라를 한 손에 움켜쥐며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카메라 셔터 위에 손가락을 고정시킨다. 흔들림 없는 초점이나 정확한 노출을 계산할 여유로운 시간 보다는 오히려 좀 더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신체 감각에 의존해 셔터를 누르며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의 잔상들을 찍기 시작했다. 촬영의 순간들이 기억나지 않는 연습용 필름이 현상되고 밀착(contact sheet)된 36컷의 사진들 속에 자동차의 소음을 차단하는 순환도로의 방음벽 위로 장소성과 방향성이 모호해지는 익명의 공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Glass city> 연작은 서로 다른 속도에 의해 마주하고 있는 도시와 개인의 심리적 거리를 투영하고 도시로부터 분리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수평적으로 배열된 평면의 흐름은 카메라 수평계와 함께 잠시 동안 서로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이루며 움직이는 도시의 이미지로서 교차된다. 나는 그러한 연쇄적 현재가 생성하는 이미지의 속도와 공간의 밀도를 고감도 컬러네거티브 필름의 입자를 통해 증폭시키며 속도가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일시적이고 고유한 시각 신호인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로서 <Glass city> 연작을 인식하며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는 사진-이미지를 좀 더 단순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이며 사진의 시각적인 물성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새로운 접근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곧 시간-이미지의 힘을 단일로서 보지 않고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 관계처럼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의 상대적 시간-이미지 즉 ‘정지-이미지’(static image)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지-이미지’(static image)를 찾게 된 과정은 우연적이며 필연적이었다. 낮 동안 <Glass city>연작을 작업하고 밤이 되면 성수동 작업실에서 나와 집에 가려고 할 때 어두운 골목길에 수리를 기다리는 반파된 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공업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성수동에서 인적이 드문 밤 골목 사이사이를 점유하고 있는 사고 차량들을 찾기 위해 어두운 골목길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외형의 파손된 정도는 순간의 속력과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하게 했으며 반대로 아무런 힘과 속력도 남아있지 않는 현재 상태는 일시 정지된 시간의 양면성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를 표현하기 위해 저감도 컬러 슬라이드 필름과 소형 조명을 장착하기로 했다. 한 스톱 낮은 노출의 저감도 필름은 어두운 주변을 더 어둡게 함으로 공간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허락하고, 한 스톱 높은 노출로 발광 된 조명은 오직 차에 깊게 새겨진 상처에 선명한 표정만을 적정으로 감광한다. 이렇게 얻어진 컬러 슬라이드 필름 위에 일그러진 자동차의 이미지는 도시에 내재하는 폭력성과 이후의 상흔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계로 연결된 두 번째 연작인 <Motor collection>은 컬러 네거티브와 슬라이드 필름, 즉 양화(Negative)와 음화(Positive)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낮과 밤으로 분리된 두 개의 시점과 대립한다. 그리고 동적인 힘의 세기를 정지된 시간 이미지에 응축, 담아내는 과정에서 도시공간에 말없이 흩어져 존재하는 시간을 담지한 정물 사진과 같은, 즉 ‘정지 이미지’(static image)를 포착하는 것이다.                 

<Glass city>와 <Motor collection> 연작의 배치는 상대적인 시간과의 물리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성질의 시간이 서로를 강력하게 맞서고 있는 양면적인 성질을 띄고 있기도 하다. 나는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이 두 시간-이미지의 대립을 공간으로 확장시키고 동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정체되어 있는 도로 안에서 어떠한 사고의 흔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옮겨간 세 번째 연작 <Speedway>는 출발과 도착의 중간 어디쯤에서 발견하게 되는 충돌의 흔적을 추적한다. 견고한 콘크리트 도로 위에 새겨진 공간의 균열은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속도를 정지시키고 사건의 장소와 사건의 중심으로 전환시킨다. 움직임과 정지 그리고 충돌이라는 연속적인 현상의 증거로 귀결되는 세 연작의 배치는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지속되는 사진-이미지의 힘의 관계를 설정하며 유지시킨다.

<Glass city>, <Motor collection> 그리고 <Speedway> 연작을 작업하며 때로는 역동적이고 때로는 정적인 시간의 속도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세 연작의 배치는 서로 다른 시간에서 발생한 각각의 공간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나는 그 사건들의 물리적 힘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부터 오게 되는지 그 시작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찾게 된 자동차 운전 교육장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 그리고 속도를 제한하는 표지판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운전을 하는 위치에서 볼 수 없었던 시점과 관점 그리고 흑백사진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무채색(achromatic colors)을 통해 겹겹이 쌓인 공간의 레이어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많은 운전자들이 거쳐간 이곳에서 수없이 지나간 차량의 흔적과 낡고 오래된 표면의 입자는 레이싱 경기장(Circuit)처럼 묘한 긴장감을 나타낸다. 또한 선과 공간으로 분리된 이 장소의 기능성은 시간이 정지된 듯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동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에서 나의 모드(mode)는 흑백필름으로 전환되어 두 개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이 충돌되기 이전에 나타나는 불안한 사건의 징후들을 암시하며 회색의 질감과 명암의 계조를 통해 과거의 시간으로 이동시킨다.                  

 

카메라에는 mode라는 버튼이 있다. 촬영자가 이 버튼을 누르며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부합하는 기능을 찾는 것처럼 나의 mode는 작용과 반작용으로 확장되어가는 각각의 연작을 사진의 다양한 프로세스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각각의 단일한 시간이 보여주는 다양한 속력처럼 나의 주체적인 시선과 카메라의 다양한 촬영술은 각각의 연작들이 놓여져 있는 상황과 환경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를 나타낸다. 이러한 형식과 방법은 완성될 수 없는 퍼즐처럼 서로 다른 시간성과 물질성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이 불완전한 세계의 시간을 잠시나마 완전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정밀하고 정교한 시퀀스(sequence)로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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