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면의 시간
Holy Motors, 허구에서 실재로
조준용의 사진전 《Holy Motors》(2024)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레오 카락스(Leo Carax)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 홀리 모터스(2012)를 느슨하게 오마주한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한 작업은 아니다. 애초부터 그의 사진은 도로 위를 달리면서 자동차 바깥으로 투사하는 특정적 방식을 지속해 왔다. 그 시작은 경부고속도로였다.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받아 최초의 산업화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작가의 아버지의 베트남 참전 서사가 덧붙여진다. 그렇게 조준용은 참전 당시 아버지의 사진을 한밤의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허공에 투사한다. 지나가는 화물열차 트레일러가 스크린이 되어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매우 사적인 기록물이 허공에서 꿈틀거리다 사라진다. 이는 아버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작가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향한 일종의 제의에 가까운 작업으로 산업화, 국가, 국제정치, 베트남, 열대의 풍경이 듬성듬성 얽힌 냉전 시대의 몽타주가 나타났다 사라진다(Memory of South, 416km, 2014). 그럼 이쯤에서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 영화는 영화가 걸어온 길을 모더니티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전유한다. 사진은 기계미학의 첨병이자 모더니티를 상징한다. 이 광학술의 기계는 고전주의적 재현의 의미를 한순간에 소멸시킨다.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사진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락스는 이처럼 사진의 탄생부터 연속사진의 등장과 최초의 영화의 탄생을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처럼 보여준다. 판도라를 연 인물은 카락스 자신이다. 영화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지닌 한 인물(드니 라방, Denis Lavant)의 일상을 따라간다. 끊임없이 갈라지는 이야기들이 관통하는 주제는 세상을 보는 시선에 있다. 특히 카메라가 포착하는 대상의 기이함을 통해 정체성을 질문하고, 나아가 비물질적인 가상공간 시스템은 디지털 시대의 존재와 실재에 관한 철학적인 물음이 내재한다. 여기에서 홀리 모터스는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리무진의 이름이자 신의 죽음 이후 기계문명이 이룩한 최고의 상징물을 비유하는 듯하다. 절정에 도달한 영화의 중간에는 파리의 시테 섬(Île de la Cité)으로 향한다. 카메라는 모더니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라사마리텐 백화점(La Samariaine) 안으로 빨려들 듯 진입한다. 갑자기 호주의 팝스타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와 드니 라방(Denis Lavant)이 만나 할리우드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미장센이 펼쳐진다. 실재와 가상이 혼합된 이 장면은 당시 폐업한 라사마리텐을 통해 폐허가 된(지연된) 모더니티의 현재를 암시한다. 카락스는 강철로 만들어진 에펠탑처럼 용도보다도 높이와 속도를 향해 질주하던 시대의 몰락과 비물질화된 이후의 시대를 교묘하게 몽타주 한다.
비장소
앞서 그의 초기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준용의 사진은 개인적 물음에서 시작되어 냉전시대를 거쳐 과거를 현재로 소환함으로써 그의 작업이 필연적으로 모더니티의 유산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작업은 산업화를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와 아버지의 월남참전 기억을 상호교차함으로써 개인과 국가, 국가와 산업화의 길목에서 20세기 한국이 지나온 경로를 탐구하는 계기를 통해 조준용은 도로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첫 전시 이후에도 도로는 고속도로의 방음벽, 고층 아파트 벽면 등을 스크린으로 이용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비장소의 시설물이 스크린으로 전유되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사진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가 생계를 위한 활동이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이동하는 시간에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교통 정체 구간에 있을 때나 가능했기에, 그는 아예 정체 구간에서 사진을 찍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렇게 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는 한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로 반대편 손을 이용해 주로 자신의 측면을 피사체로 삼는다. 어떤 대상이 사진의 피사체가 될 것인지를 완벽하게 결정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한계이면서 또한 하나의 미학적 실험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측면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도심의 고속화 도로 위에서 자동차의 속도를 감안하여 피사체를 직접 보지 않고 한 손으로는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은 카메라를 쥔 상태로 셔터를 누른다. 이쯤 되면 자동차의 속도와 카메라의 속도가 동기화되었다고 불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건, 왜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사진을 찍는가이다. 사실 실험은 목적지가 없기에 그저 온몸을 이용해 더듬어가며 시도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정답이 없기에 먼저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기계와 신체 사이의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이 뒤따른다. 그렇게 포착된 사진들은 납작하고 비인칭적이며 불투명한 무언가였다. 그는 분명히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면만을 응시해야 하는 도로에서의 측면은 비장소 그 자체였다. 고층 아파트와 방음벽으로 매워진 지나가는 장소는 그 무엇에게도 정동을 느끼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조준용의 사진은 삶의 이야기가 담긴 인류학적 장소가 아닌 비인칭의 대상, 그래서 ‘서사의 공백’ 상태인 비장소에 정초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고속도라는 비장소에는 주로 방음벽과 같은 구조물, 토목시설 등이 즐비한데, 이러한 사물들은 신자유주의 자본가치를 위해 존재한다. 소음을 줄이는 방음벽은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장치 그리고 더 빠른 물류 운송을 위해 삶의 형태는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바깥’의 존재를 지우는 장치가 된다. 조준용이 시도하는 측면의 사진은 전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비틀어 도로와 삶의 경계를 틈입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인칭
조준용의 사진은 기계문명과 연관이 깊다. 특히 그에게 도로는 사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여주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로에 대한 관심과 이를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것이 속도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비판하기 위함은 아니다. 미술사적 관점으로 볼 때 속도란 미래주의의 유산과 동기화되는 경우가 대부분 일 텐데, 조준용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속도는 미래주의적이라기보다 산업화라는 이념이 임계점을 넘어 더 이상 조절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모더니티에서 벗어나지도, 그렇다고 정주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주차장이 되어버린 고속화도로, 교통문화의 변화로 인해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자동차 면허시험 연습장, 사방이 고층아파트로 막힌 도로의 주변과 속도에 의해 멈춰 서버린 수리를 기다리는 자동차의 모습은 이미 현재로 들어온 미래라는 디스토피아와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디스토피아가 낯설거나 특이해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조준용의 사진이 세계의 종말을 재현하거나 그런 미래를 포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유형학적 사진과는 달리 사건의 현장 내부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방식은 전지적 시점이 아닌, 도로라는 구조물 주변의 비인간 존재를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을 사유하게 한다. 어찌 보면 주어진 한계 상황을 통해 세계를 관측하려는 시도가 다소 제한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 여정을 통해 작가는 드디어 도로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겹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결국 텅 빔(blankness)이라는 외상에 도달한다. 정체 구간의 가다 서기, 여기저기 부서진 동어반복적인 도로의 구조물, 스키드 마크의 틈새를 따라가다 보니 나타난 자동차 운전연습장은 자본-기술-문화-사회의 속도 사이의 어긋남이 어떻게 본다는 현실을 파열(rupture) 시키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할 포스터(Hal Foster)는 이미지의 반복과 재생산은 결국 혼란과 되돌이킬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조준용의 사진은 구체적인 목적이나 비평적 지점을 설정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비장소와 비인칭의 대상을 기록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기호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더럽거나 거칠고 부서져 있지만 스펙터클을 가지지 않기에 사람들이 외면해온 장면들이다. 그의 사진이 가진 아름다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Holy motors>_작업노트
조준용
2019년, 한 대의 35mm 자동 필름 카메라로 시작된 사진의 여정은 어느덧 여섯 번째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간의 퍼즐과 같은 사진은 이제 서로를 붙잡으며 마치 장편의 영화처럼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 같다. 이제 막 시작한 7번째 연작은 또 어떤 감각으로 그동안의 연작들에게 예상치 못한 시간을 이어줄수 있는지 기대하며 카메라를 움켜진다.
<Glass city>
나에게 운전 중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는 복잡하게 얽힌 도시의 구조로부터 잠시 이탈해, 시간과 공간의 주체가 되어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유한한 자유의 시간이다. 시동을 켜고 본능적으로 조수석에 놓인 소형 자동카메라를 한 손에 움켜쥐며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카메라 셔터 위에 손가락을 고정시킨다. 흔들림 없는 초점이나 정확한 노출을 계산할 여유로운 시간 보다는 오히려 좀 더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신체 감각에 의존해 셔터를 누르며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의 잔상들을 찍기 시작했다. 촬영의 순간들이 기억나지 않는 초기 연습용 필름이 현상 되고 밀착(contact sheet)된 36컷의 사진들 속에 자동차의 소음을 차단하는 순환도로의 방음벽 위로 장소성과 방향성이 모호해지는 익명의 공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Glass city> 연작은 서로 다른 속도에 의해 마주하고 있는 도시와 개인의 심리적 거리를 투영하고 도시로부터 분리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수평적으로 배열된 평면의 흐름은 카메라 수평계와 함께 잠시 동안 서로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이루며 움직이는 도시의 이미지로서 교차된다. 나는 그러한 연쇄적 현재가 생성하는 이미지의 속도와 공간의 밀도를 고감도 컬러네거티브 필름의 입자를 통해 증폭시키며 속도가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일시적이고 고유한 시각 신호인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로서 <Glass city> 연작을 인식하며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는 사진-이미지를 보다 단순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였으며, 시간을 미립적 감각으로 사유하려는 접근이었다. 곧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미지의 힘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 관계처럼 상호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에 대응하는 상대적 시간-이미지, 즉 ‘정지-이미지’(static image)를 탐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Motor collection>
‘정지-이미지’(static image)를 찾게 된 과정은 우연적이며 필연적이었다. 낮 동안 <Glass city>연작을 작업하고 밤이 되면 성수동 작업실에서 나와 집에 가려고 할 때 어두운 골목길에 수리를 기다리는 반파된 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공업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성수동에서 인적이 드문 밤 골목 사이사이를 점유하고 있는 사고 차량들을 찾기 위해 어두운 골목길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외형의 파손된 정도는 순간의 속력과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하게 했으며 반대로 아무런 힘과 속력도 남아있지 않는 현재 상태는 일시 정지된 시간의 양면성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를 표현하기 위해 저감도 컬러 슬라이드 필름과 소형 조명을 장착 하기로 했다. 한 스톱 낮은 노출의 저감도 필름은 어두운 주변을 더 어둡게 함으로 공간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허락하고, 한 스톱 높은 노출로 발광 된 조명은 오직 차에 깊게 새겨진 상처에 선명한 표정만을 적정으로 감광시킨다. 이렇게 얻어진 컬러 슬라이드 필름 위에 일그러진 자동차의 이미지는 도시에 내재하는 폭력성과 이후의 상흔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계로 연결된 두 번째 연작인 <Motor collection>은 컬러 네거티브와 슬라이드 필름, 즉 양화(Negative)와 음화(Positive)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낮과 밤으로 분리된 두 개의 시점과 대립한다. 그리고 동적인 힘의 세기를 정지된 시간 이미지에 응축, 담아내는 과정에서 도시공간에 말없이 흩어져 존재하는 시간을 담지한 정물 사진과 같은, 즉 ‘정지 이미지’(static image)를 포착하는 것이다.
<Speedway>
〈Glass city〉와 〈Motor collection〉 연작의 배치는 상대적인 시간과의 물리적 관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서로 다른 성질의 시간이 강하게 맞서고 있는 양면적인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처럼 서로를 밀어내는 두 개의 시간-이미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간을 동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정체된 도로 위에서 사고의 물리적 흔적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옮겨간 세 번째 연작 〈Speedway〉는 출발과 도착이라는 이동의 논리에서 벗어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발생한 충돌의 흔적을 추적한다. 견고한 콘크리트 도로 위에 새겨진 균열과 스키드마크는 출발과 도착이라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고, 무의미한 통과 지점에 불과했던 장소를 사건이 발생한 시간의 중심으로 전환시킨다. 이 도로 위의 새겨진 흔적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속도와 힘이 남긴 결과이자, 더 이상 재현될 수 없는 사건의 표면이다. 나는 이 표면을 촬영하며, 속도가 사라진 이후에도 공간에 잔존하는 시간의 밀도와 방향성을 감각적으로 더듬는다. 움직임이 제거된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속도의 결과로 응축된 물질의 변형이며, 이는 동적인 힘이 정지된 상태로 고착된 또 하나의 시간-이미지로 작동한다. 〈Speedway〉에서 도로는 더 이상 이동을 위한 인프라가 아니라, 충돌과 마찰, 정지의 시간이 압축된 하나의 장면이 된다. 속도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속도의 부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소로 전환되는 순간, 나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대신 시간의 흔적을 응시하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이러한 움직임, 정지, 충돌이라는 연속된 현상의 증거로 구성된 세 연작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사진-이미지들 사이에 지속적인 힘의 관계를 형성한다. 〈Speedway〉는 이 힘의 관계가 가장 응축되는 지점으로서, 속도와 정지, 사건과 잔여, 이동과 체류라는 시간의 양극단이 하나의 표면 위에서 공존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Circuit>
〈Glass city〉, 〈Motor collection〉, 〈Speedway〉 세 연작을 통해 나는 역동적이거나 정적인 시간의 상이한 속도감을 서로 다른 촬영 방식과 사진적 감각을 통해 경험해왔다. 이 세 연작의 배치는 서로 다른 시간에 발생한 공간들을 마치 하나의 사건으로 사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 사건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안에 작용한 물리적 힘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작업의 시선을 사건의 결과에서 기원으로 이동시켰고, 작업 초기부터 각 연작의 맥락을 작용과 반작용으로 인식해 온 태도는 그 연장선에서 다음 연작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질문 속에서 발견하게 된 문을 닫은 자동차 운전 교육장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 그리고 속도를 제어하는 표지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많은 운전자들이 거쳐 간 이 장소에는 반복적으로 지나간 차량의 흔적과 낡고 오래된 표면의 입자들이 축적되어 있었으며, 이는 마치 레이싱 경기장(circuit)을 연상시키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동력을 상실한 공간에서 정체된 나의 시선은 차량 밖으로 잠시나와 운전중에는 볼수 없었던 자유롭고 무질서한 걸음으로 이 세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운전자의 위치에서는 인식할 수 없었던 시점과 관점은 흑백사진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무채색을 통해 드러나며, 색이 소거된 채 선과 면으로 분리된 이 장소의 기능성은 시간이 정지된 듯하거나,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알 수 없는 평온함과 미세한 비인칭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동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에서 나의 모드(mode)는 가시적 시간 너머를 기록하는 적외선 흑백 필름(Infrared Black and White Negative Film)으로 전환되었으며, 동력이 상실되어 가는 사건의 징후를 암시하며 어떠한 힘의 방향이나 위치도 존재하지 않는 무-동력의 상태에 잠시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의 시간은 편안함과 낯설음을 교차시키며, 그 어느 쪽에도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Obscure driver>+<Roadside tree>
동력을 상실한 공간에서 정체된 나의 시선은 다시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운전자<Obscure driver>와 정지된 풍경<Roadside tree>의 동체를 함께 추적하기 시작한다.
잠시 머물러 있던 무-동력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운전자는 이곳을 스쳐 지나며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공간은 멈춰 있지만, 시간은 여전히 익명의 운전자를 따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짙게 썬팅된 차량의 창문 너머로 옅게 드러난 운전자의 옆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던 흐름은 순간적으로 동기화된 속도 속에서 겹치고, 그 찰나의 일치 속에서 형상은 반복적으로 포착되었다가 사라진다. 오른쪽 창문으로만 포착되는 불특정 다수의 운전자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부유하는 사적 공간 안에 놓여 있다. 은밀하게 작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파파라치처럼 폭력적인 공격성을 내포하지만, 짙게 코팅된 유리창 위로 드러나는 운전자의 실루엣과 제스처는 특정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차단한 채, 도시로부터 소외된 운전자의 일시적인 형상만을 투과한다. 개방적이지만 고립된 이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정한 거리와 속도, 그리고 숨어 있는 시선은 익명으로서의 쾌감과 언제든 차선을 바꾸어 회피할 수 있는 군중 속의 안도감을 동시에 확보한다. 이러한 비장소의 세계에서 비인칭의 운전자인 나와 그들은 측면에서 만나고, 측면에서 기록되며, 끝내 선명하지 않은 기호로 남는다. 이러한 사이에서 나의 카메라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주체’라기보다, 비인칭의 운전자와 동일한 조건 속에서 나란히 흐르는 존재로 기능한다. 속도, 거리, 차선, 유리창이라는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생한 시선은 서로를 교차시키며, 이 만남은 정면의 대면도 충돌도 아닌, 서로 다른 목적지와 시간을 지닌 존재들이 순간적으로 속도만을 동기화하며 측면에서 스쳐 가는 관계로 성립된다. 이는 사진이 흔히 전제해 온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비결정적이고 임시적인 동시성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반면 왼쪽 창문의 프레임으로 보이는 〈Roadside tree〉는 속도가 아닌 시간의 축 위에서 작동하는 시선을 담고있다. 이 작업은 <Obscure driver>처럼 이동 중의 찰나를 포착하기보다,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적으로 머물며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계절의 풍경을 기록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야 할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서 낮이 밤으로, 맑은 날이 비가 오는 날로, 여름이 겨울로 변화하는 동안, 늘 지나치던 도로의 길목에 잠시 정차한 채 가로수의 변화를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응시한다. 익명으로서의 쾌감이나 군중 속의 안도감이 필요하지 않은 일차선 나들목(interchange) 위에서, 차창 안의 동일한 프레임은 대상의 공간적 이동을 제거하고 시간의 지속만을 남긴다. 이 반복된 프레임 속에서 가로수는 예측 가능하고 지루한 변화의 궤적을 따라가며, 사건이라기보다 축적된 시간의 결과로서 풍경을 드러낸다. 그러나 〈Obscure driver〉와 〈Roadside tree〉를 병치해 바라보는 순간, 시선의 주체는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응시의 중심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정지한 가로수의 풍경이며, 그 풍경이 바라보는 대상은 차창 안에 놓인 나, 즉 도시로부터 소외된 운전자가 된다.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평면 위에 병치된 두 이미지의 시점을 느슨하게 동조시키며, 익명의 풍경과 익명의 운전자를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로 공유하게 만든다. 움직임과 정지, 내부와 외부, 고립과 개방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의 전환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며들고, 그 교차의 중심에서 실재와 현재의 경험, 그리고 인식의 대칭은 다시 도로의 정면을 향해 출발한다. 이것은 〈Glass city〉, 〈Motor collection〉과 같은 대립이 아니라,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각기 다른 감각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겹쳐지는 어긋난 시선의 만남으로 작동된다.
카메라에는 mode라는 버튼이 있다. 촬영자가 이 버튼을 누르며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부합하는 기능을 선택하듯, 나의 mode 또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확장되어 가는 각각의 연작을 사진의 다양한 프로세스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단일한 시간이 서로 다른 속력으로 인식되듯, 나의 주체적인 시선과 카메라의 다양한 촬영술은 각 연작이 놓인 상황과 환경,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를 드러낸다. 하나의 연작에서 출발해 여섯 번째 연작으로 이어지는 동안,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진 안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사진을 찍어온 사진적 행위에 대한 감각이었다. 이러한 연속된 흐름은 사진을 결과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작용과 반작용이 축적되는 감각의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형식과 방법은 완성될 수 없는 퍼즐처럼 서로 다른 시간성과 물질성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내가 바라보는 이 불완전한 세계의 시간을 잠시나마 유지하고 연결하는 하나의 정밀하고 정교한 시퀀스(sequence)로 작동되기를 기대한다.